‘피터 드래커'는 “미래는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가는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공동체가 성장 발전하려면 선진 발전상과 경쟁력과 기술 문화 정보를 가감없이 도입 접목해야 후진성을 탈피할 수 있습니다.
이에 ‘사)피아비한캄사랑'은 선진 캄보디아를 위해 미래 꿈나무 지도자를 양성하고 국민의식과 문화 선진화에 희망 사다리 역할을 다짐해 봅니다.
스롱 피아비의 애국심과 열정이 품격 있는 문화강국 (캄보디아) 발전에 진취적이고 미래지향적으로 자리매김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모처럼 분출한 스롱피아비의 생각과 가치가 사업을 통해 녹아내리도록,
용트림이 헛되지 않도록, 견인차적 엔진이 꺼지지 않도록 “위대함의 도전 (Challenge to Greatness)” 기회의 페달이
힘차게 밟아질 수 있도록 여러분의 많은 성원을 소망하고 기대해 맞이 않습니다
안녕하십니까? 피아비 한캄사랑의 대표이사 스롱피아비입니다.
저는 캄보디아의 작은 마을 ‘캄퐁참’에서 태어났습니다. 한국으로 비유하자면 ‘충청북도’와 비교할 수 있겠네요.
사람이 많은 편도, 적은 편도 아니지만 사람과 사람이 이어지기엔 적절한 그런 곳이었습니다. 저는 어릴 적, 매우
바빴습니다. 아버지의 감자 농사를 돕거나, 개미털이를 돕고, 집을 짓거나, 소몰이를 했습니다. 하루에 14 시간이
넘는 노동을 하며 아버지를 도와가며 살아왔습니다. 우스갯소리로, 비오는 날이 얼마나 좋던지요, 비라도 오면
잠시 동안 집 안에서 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방학이 얼마나 싫었는지… 학교에 8 시 30 분까지만
등교하면 되지만, 방학때는 아버지의 일을 돕기 위해 6 시까지 농장에 갔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모두
따뜻했던 지난날의 추억이고, 사랑스러운 저의 어린날이지요.
제가 20 살이 되던 해 2010 년, 한국에 처음 오게 되었습니다. 일생에 다시는 보지 못할 남편을 만나, 전 한국이란
나라의 모습을 가까이 볼 수 있었습니다. 처음 한국을 보았을 때의 기분은 아직도 잊히지가 않습니다. 단순히
돈이 많은 나라가 아니라, 무언가 굉장히 빨랐습니다. 모든 공무원들은 5 분안에 제 애로사항을 해결해 주었고,
많은 사람들은 양심과의 대화에서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거리에 저와 비슷한 나이의 친구들은 항상 책을 읽고
있었고, 대부분의 사회참여자들은 노동시간과 여가시간의 구분이 뚜렷했습니다. 전 캄보디아와 한국의 차이점에
대한 궁금증을 마음에 품고 항상 살아갔습니다. 그리고 최근 에서야 그 문제의 실마리를 풀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교육’입니다. 한국은 상상력과 창의력, 집중력과 응용력 등을 키우는 훈련을 아주 좋은 환경에서 받습니다.
그렇기에, 한국인 자신들은 모르지만, 모두 굉장히 상향평준화 되어있습니다. 저는 그런 한국을 보며 캄보디아의
어떤 부분이 문제인지, 어떤 부분을 바꿔야만 그들의 훈련에 도움이 될지를 늘 생각해왔습니다.
저 혼자도 살 수 있는 저의 인생이지만, 누군가 대신할 수 없는 일을 하기 위해 제 한 몸을 받치겠습니다.
누군가 알아주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들을 돕는 이유는 없으니까요. 그저, 그들의 삶이 더 나아지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저와 직원들은 가장 숭고한 마음으로 이 대업을 진행시킬 것입니다.
함께해주신 후원자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항상 그들의 교육을 신경쓰는, 지속 가능한 목표를 위해
나아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스롱피아비 올림